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김영하

처가에 내려갈 일이 있어 KTX를 탔다. 대전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11호 차에 올라타서 무거운 백팩을 짐칸에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아, 책이라도 꺼낼걸…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갑자기 무거워진 눈꺼풀과 요즘 잦은 야근으로 대화할 시간이 부족한 아내가 생각나서 그냥 앉았다. 하지만 몇 마디 나누다가 대화가 끊기고 각자 트위터 확인하다가 둘 다 잠이 들어버렸다. 서대전역이 가까워졌을 때 알아서 눈이 떠졌다. 정말 달콤한 잠이었다.

처가에 왔다. 방학이라 내려간 아이들과 장인/장모/처제/처남이 우리를 반겼다. 특히 딸이 보고 싶었다며 와서 와락 껴안는다. 이런저런 안부를 물어보고 점심을 먹고 애들을 데리고 지질박물관으로 향했다. 크게 볼 것은 없었지만, 공룡에 필이 꽂혀있는 애들이라 좋아했다. 다행이다. 돌아오는 길은 토요일 오후답게 엄청난 정체다. 택시에서 졸고 졸아도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 서대전역 부근에 있는 코스트코에 들어가려는 차들 때문에 정체가 심해진 것이었다. 기사 양반이 이 정도는 파악하고 돌아갈 줄 알았는데…쳇 택시비만 4000원가량 더 나왔다.

처가에 와서 저녁을 먹고 TV를 보고 또 애들이랑 놀다 보니 취침시간이다. 책은 하나도 못 봤다. 리듬이 깨지면 안 되는 데 하면서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루가 지나 일요일 아침이다. 작정하고 책을 펼친다. 제목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작품이다. 김영하의 데뷔작이라고 볼 수 있는 책이다. 특이한 제목과 외국 및 국내의 유수 매체에서 호평이 쏟아지는 작품이라 호기심이 많이 생겼다. 더군다나 장편소설이지만 매우 얇다.

아직 어젯밤 깔아놓은 이불이 깔린 방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조금은 어둔 조명에 책을 펼쳤다. “마라의 죽음” 그림을 보여준다. 한참을 유심히 봤다. 욕조에 한 남자가 한 손에는 펜을 다른 한 손에는 편지를 들고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모습이다. 궁금증은 몇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해가 되었다.

주인공은 특이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저 상담을 해주고 더 깊은 상담이 필요하면 적절하게 돈을 받아서 도와주는 것 같았다. 1년에 반년 정도는 일하고 반은 여행을 가거나 쉰다고 한다. 프리랜서인가?

상담자 역시 아픔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여인들이다. 여기서도 섹스는 빠지지 않는다. 김영하의 장기라고 해야하나… 그의 작품을 몇 편 보다 보니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다. 섹스는 그냥 일상이고 비난받거나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무미건조하고 차가운 느낌이 이 책을 뒤덮고 있다.

너무 편하게 책을 보다 보니 집중이 잘 안 되었다. TV 소리, 애들 노는 소리에 그리고 은은한 조명에 꾸벅꾸벅 자꾸만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도 내심 독서를 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해서 끝까지 읽었다. 환한 아침에 시작한 독서가 어두워진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내용과 인물 그리고 사건 등이 머리에 뒤섞여 잘 조합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결말을 보고 나서 ‘앗’~하고 뭔가가 나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 그래서 그렇구나…’ 문득,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책을 다시 펼쳤다. 이상하리만큼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상담사란 직업이란 게 뭔가를 …왜 그렇게 하는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한나절동안 흥미를 끌지 못한 소설을 단 15분 만에 빠져들었다.

어젯밤에 이 소설을 다시 보고 잠들었다가 악몽을 꿨다. 나는 어느 유흥업소에 원치 않게 감금되어 있다. 일을 해야 했다.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손님들 앞에서 처량하고 기교가 필요한 어려운 노래를 불렀다. 왜 그랬을까. 노래하는 3분의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음정도 박자도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는 가사도 생각나지 않았다. 야유를 받고 무대 밖으로 퇴장했다. 업소 주인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무 조건 없이 날 풀어주겠다고 했다. 난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했다. 처음부터 차근히 다시 연습해서 무대에 서겠다고 했다. 명예회복을 하고 싶었다. 잘한다면 두둑한 보수도 달라고 했다. 주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으로 잠시 나와 멀리 남산타워가 보이는 곳으로 향해 걸었다.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에 입가에 입김이 연기처럼 흩날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굉음을 내는 무엇이 남산타워를 지나 종로로 향하고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수백 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전투기들이 마치 새떼처럼 하늘을 덮었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었다. 종로 국세청 빌딩이 미사일에 맞아 박살이 났다. 불꽃, 천둥소리, 화약냄새…아. 전쟁인가?…그렇게 잠이 깼다.

아마 이 소설 때문일 것이다. 악몽을 꾼 건. 누구든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머리가 먹먹해지고 혹은 매스꺼움을 느낄 것 같다. 비위가 좋지 않은 이상…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동생의 애인인 유디트, 비엔나에서 만난 콜라만 마시는 여자 그리고 행위예술을 하는 미미까지. 소설 속의 작가이자 주인공은 이들 중 두 명의 자살을 도와준다. 다양한 방법과 사례를 보여준다. 완벽한 자살을 위해 현장에 작가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치밀함도 보여준다. 지문방지를 위해 장갑을 낀다거나, 마지막 섹스를 원하는 고객을 위해 콘돔을 착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을 지켜보며 자리를 뜬다.

작가의 상상력이 무섭다. 김영하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것 일까… 불현듯 회색이 머리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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