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 김영하

“짬짬이”

독서에 최대한 시간을 할애하려다 보니 출근해서 피시가 켜지는 10분, 점심 먹고 30~40분 동안 책을 본다. 아침에는 정신이 맑아서 머리에 잘 들어오는데, 밥을 먹고 나면 졸음이 쏟아져 책 보기가 쉽지 않다. 커피를 한잔하기도 하고 차에 가서 자일리톨 한 알을 가져와 씹어가며 잠을 쫓는다.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읽고 있다. 장편임에도 아직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서 괜찮긴 한데, 몽롱한 정신으로 읽었던 부분 때문에 스토리 연결이 원활치 않아서 그 부분을 다시 읽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짬짬이 독서의 단점인 것 같다. ^^

구성이 독특하다. 차례를 보면 “AM 07:00 …” 시작해서 “AM 07:00″으로 끝이 난다. 인기 있는 미드 “24”의 구성이 연상된다. 먼저, 맞벌이하는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보여준다. 현실감이 있어서 공감 가는 부분도 많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볍고 밝은 드라마 한편이 될 거라는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장인 기영이 회사에서 느닷없이 비밀 명령을 받는 부분부터는 급속하게 상황이 반전되며 김영하식 암울, 차가운 모드로 진입한다. ‘아..이제 엄청난 상상력이 펼쳐지겠구나…’

1992년 동방불패가 한창 흥행 돌풍을 일으킬 때로 돌아간다. 또 전설의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죽음도 나온다. 작가가 되려면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거나 기록해 둬야 하는 가보다. 어떤 식으로 정리를 하는지 아니면 익숙하게 자료를 찾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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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떨어진 남파간첩 이야기” 요즘 같은 시대에 간첩이란 용어가 무섭다기 보다는 낯설게 느껴진다. 오히려 무덤덤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재미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끈 떨어진 간첩은 뭔가 재미있는 사연이 있어 보인다. 점조직으로 움직이다 보니 중간에 한명이라도 끊기는 날에는 완전 낙동강 오리알이 된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기 시작하면 그들도 어쩔수 없는 가장들이 되는 것이다. 돈을 벌어야 한다. 직업을 가져야하고 또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언제 무슨일이 갑자기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긴장감은 늦출 수 없다. 철저하게 혼자 그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한두 해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나면, 아무런 연락없이 마치 북에서조차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주인공 기영은 점 조직으로 구성된 남파간첩이다. 남한에서 대학을 나왔고 운동권에 가담했고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직장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던 어느날 지령이 떨어진다. 북으로 복귀하라는… 10년이나 끈 떨어진 채 살아오다가 뜬금없이 내려온 명령에 갈등한다. 한때 같이 운동권 출신이었던 아내 마리, 자식인 현미 그리고 자본주의에 익숙해져버린 자신의 사고방식에 흔들린다.

평범한 도시의 가장은 회사에 출근하여 한 통의 이상한 전화를 받으면서 그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난다. “남파간첩”. 기영이 의심 많은 사무실 직원을 따돌리는 장면, 지하철에서 용의주도하게 미행을 피할 때 느껴지는 긴장감과 스릴감은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이 와중에 기영의 아내인 마리는 권태기를 지나고 있다. 어느새부터 알게 된 20살 연하의 대학생을 만나며 욕구를 푼다. 김영하는 이런 장면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한 편의 포르노를 보듯 정밀하고 과감하게 등장 시킨다. 마리는 남편과 딸이 출근과 등교를 한 뒤 태연하게 젊은 애인에게 문자를 보내 점심약속을 한다. 초반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커피숍, 와인 삼겹살집을 거쳐 러브호텔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며 마침내 절정에 이른다. 기영의 가치관에 대한 갈등만큼 마리의 정사가 기다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연주곡처럼 처음에는 조금 강하게 중간중간은 부드럽게 그리고 마지막 절정에선 몰아치듯 감정적인 사정을 유도한다.

김영하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은 사건들을 현실감있게 구성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강변북로에서 경주마들이 뛰어 다니는 장면이나 유키구라모토와 같은 유명한 음악가나 미술작품, 익숙한 장소와 사물을 직접 인용하여 허구인 소설에 사실을 접목한다.

아쉽다면 결말이다. 조금은 급조된 느낌이다. 기승전까지는 잘 이끌고 왔다가 결말에서는 갑자기 끈이 떨어진 간첩인양 이야기가 끝을 맺는다.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무엇도 주지 않은 채 그냥 허무하게 끝이 난다. 오히려 마리가 젋은 애인과 그 애인의 친구와 모델로 향하는 거, 모텔에서의 디테일한 정사신이 뇌리에 더 깊이 박히는 듯 하다.

책장을 덮고 주위를 둘러본다. 지금 한창 근무하고 있는 동료들 중에 끈 떨어진 불쌍한 인간이 있지는 않을까. 묵묵히 자기일을 열심히 하고 웬만해선 눈에 띄지 않는 사람… 그들이 간첩일까? 끈 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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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빛의 제국 – 김영하

  1. hangozip 2012/02/02 (1:40 오후) Reply

    결말이 허망하기 때문에 더욱더 이 소설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멋진 결말이 아니라 허망할 수 밖에 없는 간첩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분단된 조국. 너무나 아쉽고 허탈한 현실이며 사실로 받아 들이고 싶지 않은 북한과 섬나라가 되어 버린 대한민국. 언제쯤 중국을 러시아를 유럽을 기차타고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올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대륙의 기상을 다 잃어버리기전에 통일이 되기를 아니면 교통이라도 자유롭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 jandbond 2012/02/02 (4:44 오후) Reply

      오호, 색다른 해석이구나. 멋지네. 소설의 중반부서 부터 불붙기 시작하다가 결말에 소나기가 내려 급히 꺼진 느낌이 들었어. 하지만 이 작가의 상상력과 표현은 정말 예술이다. 특히 대화체에 꼼꼼함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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