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누피야! 타자기 앞에 앉아서 이렇게 해봐. 이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모든 이야기는 항상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에서 시작하는 거야
(중략)…
그 다음에는, 도대체 왜 그렇게 한다는 거지, 라는 의문이 따라오겠지. 그 이유를 반드시 알아내야 해. 그렇게해서 도입부가 생긴다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수 있어.
초등학교 때 한참 추리소설에 꽂혀 있었다. 치밀하고 냉철한 홈즈 보다는 낭만적이고 바람기가 있는 루팡에 더 애착을 뒀었다. 당시 책꽂이에는 3~4권 정도의 루팡 소설밖에 없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추리소설 한 편을 쓰고 싶었다. 머리에는 갖가지 재미난 생각이 뒤엉키고 있었다. 재빨리 책상에 앉아 노트 한 권을 펼쳤다.
‘제목을 뭐로 하지. 아무래도 한눈에 관심을 끌게 만드는 제목이어야 하는데…’
하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글부터 쓰고 보자. 음 그러니까…주인공은… 아, 인물 선정부터 해야겠다. 루팡같은 멋진 인물을 하나 만들고…
근데, 사건이 있어야지. 등장인물간의 갈등 같은 거…뭘로 만들까…’
노트의 첫 장을 펼친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한 줄도 못쓰고 노트를 닫았다.
왜 그랬을까…
지난해 가을, 처음 인물 스케치 강좌를 듣기 시작하면서 이걸 에피소드로 엮으면 재미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회원들의 직업, 외모, 성격 등 캐릭터가 다양했다. 또 그들이 인물 스케치를 배우게 된 동기, 회원들과 선생과의 보이지 않는 갈등도 흥미가 있어 보였다. 이런 소설적인 요소와 미술적인 요소의 강좌를 함께 엮는다면 괜찮은 게 나올 것 같았다.
먼저 회원들의 성격을 분석하여 책 속에 등장할 배역을 찾았다. 재미있었다. 오랫동안 알고지내던 사람도 아니고, 단지 그림을 배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나의 소설에 등장시킨다는 자체가 짜릿했다. 그때 정의한 캐릭터들을 보자.
1. 미모의 여강사
40대 초반의 청순한 스타일, But 간간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함.
청바지와 캐주얼이 잘 어울리는 세련됨에도 그림 외의 지식은 부족, 음악을 싫어함, 물과 기름 같다고 생각함.
국어 맞춤법 취약함 ( 지우개를 지우게로, 다르다를 항상 틀리다로…)
자존심은 강하고 자기애가 강함 (자신만의 강의 스타일 있음, 맘 상하면 강의를 안 할 것 같은 스타일, 대회입상경력을 스스로 말할 정도로 인정욕구가 강함)
2. 은퇴한 꾀죄죄한 아저씨
건설업에 종사하다가 퇴직했음.
미술 외에 트럼펫도 배우며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음.
60대 초반 정도의 나이, 키는 작고 안경착용에 골초.
빵모자만 쓰면 영락없는 옛날 화백 같을 듯.
과시욕이 있으며 보수적인 스타일로 가치관이 이미 고정되어 남의 말을 듣지 않을 듯.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아줌마들과의 수다와 안부를 더 궁금해함.
3. 안과의사인 총무
미스테리한 의사,
라식수술을 하는 대형 병원이 아니라 안과 질환을 전문적으로 보는 동네 병원장.
복장 및 성격이 개방적이고 총무로서 책임감 강함.
의사의 안정적인 생활로 인생을 즐기려는 모습이 역력함.
와이프도 의사임.
구수한 경상도 억양이 베어 있음. 하지만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한 사람.
약간 각진 인상에 어찌 보면 험하기도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함, 특히 친절함으로 승부함.
아줌마들의 수다를 잘 들어줘서 다들 좋아함.
50대 초반.
4. 박진영을 닮은 반장
회식 때만 모습을 드러냄.
박진영을 닮았다고 했더니 본인이 정한용을 더 닮았다고 할 정도로 재미있고 유쾌함.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임.
총무와는 1살 차이(연장)로 꽤 친해 보임.
여러 가지 운동으로 단련된 탄탄한 모습.
50대 초반.
5. 임플란트 전문 치과의사
전형적인 의사 선생님 스타일, 한눈에 의사라고 이마에 쓰여있음.
1년에 마라톤 풀코스를 3~4회 할 정도로 자기 관리 철저함.
총무와는 의사들의 모임을 통해 안면이 있고 반장과는 등산 모임을 통해 알게 됨.
예의 바르고 타인을 배려함. 너무 밋밋한 성격..
50대 중반 정도의 나이.
6. 정체불명의 중년의 여인
저녁 시간임에도 항상 검은색 모자와 옷을 입고 나타남.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신입회원 중에 제일 잘 나감.
툭툭 내 던지는 말투로 미술선생과는 코드가 맞지 않는 듯 보임.
미술 선생도 절대 그림에 대해 칭찬하지 않음.
짙은 화장으로 나이는 분간하긴 어렵지만 심각한 노안을 고려하면 50대로 봐야 할 듯.
미술수업에서 뭔가 사건과 인물 간의 갈등을 일으킬 것 같은 여인.
7. 이해력이 떨어지지만, 성격 좋은 경상도 아줌마
선생님의 설명을 절대 한번에 이해하지 못함.
똑같은 질문을 재차 질문하는 관계로 선생이 귀찮아함.
꾀죄죄 아저씨와 같이 음악수업을 받음, 그의 추천으로 미술 수업도 받으러 왔음.
그림에는 소질 없지만 나름 열심히는 함.
응용력이 현저히 떨어짐, 거의 불가능…
50대 초반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전형적인 주부 스타일.
8. 순둥이 신입 여 은행원
성격 좋은 아가씨로 착함
키가 크고 마른 체형임, 예쁘지는 않지만 착한 이미지로 호감가는 스타일.
하지만 뭔가가 있을 것 같은…예를 들면 유부남 애인이 있다거나…
20대 후반.
9.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주부
예전에 미술교육을 받았고 인정을 받았다고는 하나 전혀 미술에 소질이 보이지 않음.
50대 초반으로 전형적인 가정주부 스타일.
자존심이 세지만 정작 노력하기 보다는 핑계를 찾는데 주력함
항상 “나는 안돼”라는 마인드가 몸에 배 있어서 같이 있는 사람 김빠지게 만듦.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잡긴 했지만 정작 중요한 글이 안 써졌다. 아니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사건을 만들고 등장인물 간의 갈등을 표출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런 걸 일종의 플롯이라고 한다. 클리브 커슬러는 등장인물보다 플롯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등장인물이야 영화감독이 배우를 선발하는 것처럼 나중에 선발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 책의 머리말은 꽤 길고 지루하다. 종이 재질도 좋지 않아서 머리에 잘 안 들어온다. 그러나 본 페이지에 들어와 유명 작가들의 글쓰기에 대한 노하우를 읽어보면 공감이 많이 가고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유명 작가들은 꾸준하게 썼다. 엉덩이가 의자에 박히도록 앉아서 썼다. 몇 시간을 자리에 앉아 쉬지 않고 쓰다고 도저히 못 쓸 것 같을 때에도 몇 시간을 더 썼다. 글문이 막혀 한 줄도 쓸 수 없을 때도 쥐어짜듯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글쓰기가 어렵거나 안 써져서 포기하려고 했던 것들이 나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유명 작가들도 겪었고 극복했던 문제인 것이었다.
글은 나를 위해 써야 한다. 잘 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대화하듯 편하게 써야 독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