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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 김영하, 그리고 나의 단편

김영하가 2010년에 발표한 단편집이다. 단편의 형식 파괴가 눈에 띈다.
2페이지 짜리 단편인 [명예살인]이 가장 특출나다. 단편이란 게 이렇게 짧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정말 간단하게 기승전결을 만들었다. 짧은 글에 살을 붙여가는 것이 단편이란걸 보여주기라도 하는거처럼 말이다.

두 번째는 [퀴즈쇼]다. 동명 장편 소설이 2007년에 문학동네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 단편이 2010년에 나왔으니 장편을 다시 단편으로 각색한 것이다. 퀴즈쇼라는 주요한 흐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이 조금씩 바뀌어 나오는데 색다른 재미를 준다. 이런 식으로 장·단편을 같은 주제로 쓴 소설은 처음 본다.

장편 퀴즈쇼는 판타지가 들어가 있다.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랑과 초라한 20대의 현실을 표현한다. 장편 퀴즈쇼에 홀딱 빠진 건 어쩌면 나도 아직 20대의 감성을 지니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설렘을 느껴볼 수 있는 퀴즈쇼(장편)가 좋았다. 반면, 단편은 단편답게 한 사건에 집중하며 최대한 재미를 끌어 올린다. 허무한 결말은 비슷하다.

명예살인의 줄거리는 피부가 엄청나게 고운 20대의 여인이 한 피부과에 취직한다. 대출을 받아 개원한 병원은 얼굴마담 역할만 하는 피부 고운 여인 때문인지 손님들로 북적인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피부좋은 여자의 얼굴에 여드름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온 얼굴에 번져 버린다. 그 많던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그 여자는 사표를 제출한다. 그리고 며칠 뒤 자살한다. 끝이다. 짧지만 강력한 임팩트를 느낄 수 있는 글이다.

얼마 전에 애가 감기 증세로 힘들어해서 자세히 봤더니 혀 속이 오돌오돌 돌기가 쏟아 있었다. 자식이긴 하지만 솔직히 파충류의 혓바닥처럼 징그러웠다. 다행히 열은 없고 잘 먹었다. 명예살인을 읽고 나서 만약, 김태희 같은 최고 미인(나는 동의 안 하지만…)의 혓바닥이 나의 자식처럼 돌기가 솟아있다면 어떠할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단편으로 만들면,

봄 햇살처럼 빛나는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기간 백수로 지냈지만 아름다운 미모에 홀린 많은 남자가 매일 현관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식사 한끼를, 선물을 받아주기를, 짧은 데이트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일을 다 해 줄 듯 했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를 돌아본다. “내가 그렇게 예쁜가?” 어느새 그녀는 자만에 빠진다. 남자들을 일회용 물티슈처럼 다루기 시작한다. 그녀에 의해 쓰여진 남자들은 몸과 마음을 모두 잃고 백수가 되거나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그녀는 너 매몰차졌으며, 이 순간들을 즐기며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훤칠하고 고급 승용차에 고가의 명품을 매일같이 선물하는 재벌 2세와 결혼하기로 한다. 명품 쇼핑하느라 입술에 트라블이 생기기도 했다. 삶은 고통이 아니라 쾌락이었고 너무나 쉽게 모든 걸 얻을 수 있었다. 결혼식이 거행되는 날 흰색 드레스는 에메랄드처럼 빛나고 그녀의 미모는 더 돋보였다. 그런데 조금씩 입속이 아파왔다. 아침에 김을 싸 먹다가 볼살을 씹었는데 그게 부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별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리에 열도 조금 났다. 긴장해서 그러려니 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쌀밥을 먹는데 현미를 먹는 듯 알이 너무 거칠었다. 남편에게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남편은 숟가락을 떨어뜨린다.

“…어…당신 혀가….”

남편은 혐오스러운 걸 본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상황파악이 된 듯 화장실로 달려간다. 그리고 혀를 내민다.

“아~악~…”

핑크빛 아름다움을 비춰야 할 혀가 흰색 돌기들이 무섭게 돋아 있었다. 얼른 고개를 돌린다. 다시 거울 보기가 두려웠다. 혹시 꿈인가 해서 자기 볼을 꼬집어 보았지만, 현실이었다. 다시 거울을 본다. 아름다운 미모는 그대로였지만, 혀를 내미는 순간은 한 마리의 개구리의 그것과도 같았다. 오돌오돌한 돌기에 파리가 돌돌 말려 꼼짝없이 입속으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남편은 아내를 위로한다. 괜찮아 질 거야. 좋아 질 거야.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봐.
아내는 고개를 끄떡이며 눈으로는 미안함을 표한다. 첫 날밤인데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녀의 혀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돌기가 더 돋았고 성이 나 있었다. 이젠 밥도 모래알처럼
입속에서 돌아다녔다. 식사를 더는 할 수 없었다. 서서히 말라갔다. 한 달이 지났다. 변화가 없다. 남편과 각방을 쓴지도 벌써 한참이다. 3개월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심한 우울증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며, 남편은 외박이 잦았졌고 눈을 마주치는 걸 피했다.

달 밝은 보름에 베란다에 나와 밤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일회용품처럼 사용하고 버렸던 남자들을 생각한다.
혓바닥에 살며시 손가락을 넣어본다.
돌기가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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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영향인지 판타지와 비극에 집중된다. 삶은 고통이다. 그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고통을 미리 경험해 보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든 소설 속의 가상세계가 되었건 중요치 않다.

퀴즈쇼 – 김영하

사람의 감정은 참 묘하다.

작가 김영하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이 사람과 교감 하고 있다는 느끼면서부터다. 작품 전체를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김영하 컬렉션” 묶음 책을 사서 나름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단편집 “오빠가 돌아왔다”부터 시작했다.

단편이란 게 원래 분량 관계로 어떤 사건에 재미를 배가시키거나, 반대로 허무하고 허황된 결말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에 착착 감기는 듯한 작가의 필력에 책을 읽는 다기보다는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 듯 편안했다. 또 그의 소설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사랑과 연애 혹은 섹스가 메마른 삶을 신선하게 적셔주었다. 그러나 작가는 절정에서 갑자기 나락으로 독자를 떨어뜨려 허우적거리게 하고 만다. 허무하게. 짓궂다.

다음으로 장편을 읽었다. 장편 4권 중에 가장 얇은 순으로 순서를 정했다. 금세 지쳐서 질릴까 봐서다. “아랑은 왜”, “검은 꽃”, “빛의 제국” 그리고 가장 두꺼운 “퀴즈쇼”까지 거침없이 읽었다. 작가의 상상력과 글발에 감동을 하며 나도 이런 작품 하나 쓸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마지막 작품인 “퀴즈쇼”에 대해 얘기를 좀 더 해보자. 백수인 20대 후반의 남자는 갑작스러운 어머니 같은 할머니의 죽음 이후로 삶이 바뀌기 시작한다. 늘 이용만 당하던 애인과 결별하고 할머니가 진 빚 때문에 사는 집에서 쫓겨나 고시원에서 생활한다.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편의점 알바를 시작하지만, 이것도 여의치 않다. 월급도 받지 못한 채 잘린다. 수중에 돈도 없어서 다음 달 고시원 월세도 치를 수 없다. 그나마 유일한 낙은 인터넷 채팅사이트의 퀴즈방이다. 어릴 적부터 책이며 잡다한 지식을 많이 쌓아서 퀴즈 푸는 데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벽 속의 여인”이란 아이디를 쓰는 상당한 실력자가 나타나 퀴즈방을 이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벽 속의 여인”에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주인공은 공중파 퀴즈쇼에 나간다. 본선까지는 무난히 나갔지만 1라운드에서 탈락한다. 방송의 위력은 대단했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서 전화와 축하 문자를 받았다. 심지어는 별 친분관계가 없는 데면데면한 사람들까지도 그를 알아보았다. 그때 문득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벽 속의 여인”으로부터… (난 갑자기 애틋한 혹은 야릇한 연애의 감정을 느꼈다. 한동안 느낄 수 없었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엇이었다.). 그들은 홍대 부근 놀이터에서 처음 만나고 몇 번의 데이트를 거쳐 완전한 연인이 된다.

실제로 “벽 속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 건 주인공뿐만 아니었다. 나도 그녀에게 푹 빠졌다. 마치 20대로 돌아가 흠모하는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앞 둔 사람처럼 들떠있었다. 그 여인이 어딘가 존재할 것만 같았고 내 스마트폰에 카톡을 날려줄 것만 같았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임에도 책장이 넘어가 결말로 가는 게 아쉬웠다. 이별이 싫었다.

이건 일종의 데자뷔다. 20대를 가슴 설레게 했던 이문열의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이후로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 풋풋한 사랑과 연인이 되어가며 나누었던 대화, 말투, 몸짓 하나하나 내 기억 속에 숨어있던 감정을 들춰내고 있었다. 언제 이 작가가 내 맘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이대로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고 싶은 심정은 TV드라마 미니시리즈에 해피엔드를 요구하는 시청자와 같은 마음이다. 그러나 퀴즈쇼라는 제목이 왜 나왔겠는가, 작가는 연애질만 하게 그냥 두지 않는다. 사건이 발생한다. 엄청난 사건이 말이다. 이 책을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면 전기는 평범한 일상에서 사랑의 달콤함을, 반면 후기는 색다른 경험과 사건이 발생하며 독자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결말은…궁금한가? 나처럼 애틋한 감정을 취해 살고 싶다면 전기에서 책을 덮어야 한다. 궁금증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다. 끝까지 읽어라. 현실로 돌아오는 빨간약을 먹게 될거다. 미스테리한 사건속에서 혼돈을 겪으면서 현실로 돌아 온다. 그러나 문득 느끼게 될 것이다. “벽 속의 여인”이 어느새 나의 마음 속에서 지워져 버렸다는 것을.

작가 김영하를 만나고 싶다. 이렇게 애잔한 감정을 느끼게 해 놓고, 왜 갑자기 빼앗아 가는지.